즐거움도 슬픔도 절제할 줄 알아야
즐거움도 슬픔도 절제할 줄 알아야
  • 박석무
  • 승인 2021.05.18 1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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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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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석무] 『논어』를 읽어가다 보면 어쩔 때는 통쾌하다 못해 견디기 어려운 희열의 극점에 이르는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래서 송(宋)나라의 정자(程子)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손과 발로 춤추고 뜀뛰는 지경에 이른다(不知 手之舞之 足之蹈之)”라고 말하여 그 즐거움과 기쁨이 어느 정도인가를 설명한 글이 있습니다. 『논어』를 제대로 읽고 그 의미를 제대로만 파악한다면 참으로 지극한 즐거움에 이를 수 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팔일(八佾)편에, “관저는 한없이 즐거우면서 음(淫)하지 않고, 슬프기 그지없지만 상(傷)하지 않는다(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라는 공자 말씀이 나옵니다. ‘음’과 ‘상’을 우리말로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과 애정이 한없이 즐거운 일이지만, 즐거움이 지나쳐 그 적당함을 잃어버림을 ‘음’이라고 주자는 해석합니다. 또 주자는 슬픔이 지나쳐 화락한 마음에 해로움을 주는 것을 ‘상’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산은 주자의 해석에 동의하면서도 약간 다른 뉘앙스로 해석합니다. 아무리 즐겁고 기쁜 순간에도 경(敬)을 잊지 않음이 ‘음’ 하지 않음이라 하고,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해도 깊게 속상해하지 않음이 ‘상’하지 않음의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不忘其敬 不永傷害)

주자와 다산이 해석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주자의 해석에도 화락(和樂)하면서도 공경(恭敬)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으니, 같은 의미로 보아도 크게 틀린 내용이 아닙니다. 요즘의 세상일에서 공자의 높은 안목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해보면, 그 깊은 의미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기쁜 일이 남녀 간의 사랑과 애정인데, 즐거움과 기쁨이 조금이라도 지나쳐버리면 ‘음’에 이르러 그 남녀는 삶의 파탄에 빠져버립니다. 인간에서의 성욕이야 본능입니다. 본능을 제대로 억제할 수 있어야만 문명의 세계로 갈 수 있지만,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면 당연히 파탄에 이르고 맙니다. 슬픔도 마찬가지, 정도(正道)를 지키는 슬픔이야 인간의 감정을 순화해주는 아름다움이지만, 거기서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화락한 심성에 상처를 주어 파멸에 이르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관저’란 시경(試經)의 편이름으로, 시라는 예술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가 어디인가를 설명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비단 시라는 예술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즐거움과 슬픔에 대한 표현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켜주는데 그 근본적인 뜻이 있다면, 당연히 공자의 말은 모든 예술 분야가 도달해야 할 경지를 말해 준다고 해도 타당한 내용입니다. 공자가 다른데서 이야기한 ‘과유불급(過猶不及)’과도 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이 결과적으로 같아져 버린다는 말이니, 지나침도 안되지만, 미치지 못함도 안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예술 분야에서, 즐거움만을 선사하려다가 음란에 빠진 내용들이 얼마나 많으며, 지나친 비극을 표현하다가 비애의 도가 넘어 파탄에 이르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연관되기도 합니다. 남을 미워할 수야 있지만 지나치게 저주하고 증오해서 자신의 쾌감만 즐기다가 파탄에 이르고, 슬픔이 비관에 빠져 정도를 벗어나 겪는 불행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즐거움의 정도(正道), 슬픔의 정도는 높은 인격의 수양에서만 도달할 경지가 아닐까요.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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