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이 성리학(性理學)을 반대한 이유
다산이 성리학(性理學)을 반대한 이유
  • 박석무
  • 승인 2021.04.08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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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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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석무] 고려 말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성리학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아 학문의 주조(主潮)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초기부터 학자라는 이름을 들으려면 우선 성리학부터 연구해야 하고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야 학자라는 대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이 제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국난을 겪게 되고, 나라의 재정이 바닥이 나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면서 백성과 나라에 실익(實益)이 되는 학문을 추구하자는 생각이 일어났으니, ‘실학’이라는 학문의 이름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가 다산 정약용인데, 실학자답게 다산은 자기가 살던 시대의 행세학이던 5개 학문에 비판을 가하면서,「오학론」다섯 개의 학문을 그대로 두고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중 첫 번째의 학문이 바로 ‘성리학’이었습니다.

왜 다산은 성리학을 반대하면서, 주류학문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을까요. 다산학에 가장 깊은 조예가 있었던 위당 정인보의 주장을 통해 다산의 뜻을 알아봅니다. “이기(理氣:성리학)의 학이 내려올수록 누에고치 실이나 소의 털끝까지의 차이를 다투는 동시에, 갑론을박함이 더욱 심하여 자신들은 털끝도 나누고 자세히 분석한다면서 하늘이나 인간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다 알아낸 것처럼 자부하지만 끝내는 일용상행(日用常行)의 원칙에 도움이 없은즉, 오직 말만 많을 뿐 온종일 하는 일이 그것일 뿐 민국(民國:백성과 나라)의 실(實)을 논외로 제치고 은둔만이 유일한 주장이고, 전곡(田穀)·갑병(甲兵)‧송옥(訟獄)‧외교(外交) 등 반드시 강구 할 것을 모두 비속한 일이라 여겼다. 옛날의 풀이로 보면 사(士)는 사(仕)이니 벼슬에 나가 민국에 공헌함으로써 선비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어늘 이제 은둔으로 최상을 삼으니『중용』의 몸을 감추고 괴상한 일이나 함은 군자가 해서는 안된다 함에 해당하니, 성리학에 빗대어 산림에 숨어 사는 편함이나 도모함은 당연히 분쇄하자는 이유에서였다”(「유일한 정법가정다산선생 서론」)

성리학을 파쇄(破碎) 해야만 백성들의 일용상행(日用常行)에 도움이 되고, 민국에 실익이 있는 학문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학문의 주류이던 성리학에 대한 반대의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인보의 주장이자, 다산의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분명하게 주장했습니다. 국가와 민생에 실리(失利)·실익(實益)을 도모하는 학문이 아니고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져낼 방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리·실익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바로 실학이었습니다. 전곡(田穀:경제)·갑병(甲兵:국방)·송옥(訟獄:법원·검찰행정)·빈상(儐相:외교관접빈) 등을 반드시 강구하여 나라와 백성의 실리와 실익에 도움을 주는 학문을 할 때에야 비로소 선비다운 선비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이(理)다! 기(氣)다! 만 따지면서 산림에 숨어서 편안만 도모하던 거짓 선비들, 그들은 이기를 논하느라 나라가 망해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도, 자신은 치밀한 논리만 추구하노라고 자랑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다산만은 민국과 자신을 나누지 않고 민국을 살려내는 일이 바로 자신이 살아나는 일이라 여기고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해 나라 살리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나라를 살리고 싶은 애국자들이라면, 다산의 저서를 통해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아보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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