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모순과 부조리, 화폭에 담아 사회에 던지다
대한민국의 모순과 부조리, 화폭에 담아 사회에 던지다
  • 김은영 기자
  • 승인 2016.03.14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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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리얼리즘 한국 미술’의 아버지, 임옥상 화백-1회

 

연일 소란스럽다. 일본 대사관 앞에선 지난해 우리정부가 합의한 위안부 협상을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11일 열렸던 규탄대회에서는 시위 내용 보다 일본 아베 총리 얼굴이 그려진 형상물이 관심을 끌었다. 바로 임옥상 화백이 그린 ‘아베 총리의 두 얼굴’이라는 조형물이다. 경찰은 진압에 나섰고 조형물은 치워져야 했다.

 

▲ 임옥상 화백

 

임옥상, 그의 이름은 대한민국의 ‘민중 미술작가’의 대명사와 같다. 66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 받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핍박 받는 현장의 최전선에 늘 나와 있었다.

국내 제1호 민중미술 작가로 대표되는 삶을 살아온 그는 1979년부터 ‘현실과 발언’에서 활동하며 80년대 민중 미술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농민들의 분노를 표현한 ‘보리밥’ 등 강렬한 이미지의 민중 회화에서부터 설치, 영상, 퍼포먼스, 공공 미술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장르를 형식을 넘나들며 정치적으로 부조리한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현실과 모순을 형상화 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전남 영암 구림마을, 경기도 화성 매향리, 광주 지하철 농성역, 청계 광장의 전태일 열사 동상 등 그가 창조한 조형물들엔 우리 시대의 어둡고 슬픈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매주 일요일 인사동 ‘길거리’에서 시민들과 호흡하는 대중예술로 공공예술영역에서도 뚜렷한 한 획을 그었다.

불의에 굴하지 않고 미술로, 예술로 ‘사회 정의’를 외쳐오던 임옥상 화백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그는 뜨거운 에너지로 살아온 삶의 철학을 담담히 얘기했다. 아직 그는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왕성한 에너지를 고집하는 그의 작품 세계는 바로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자화상 그 자체다. 그의 작품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민족이 살아온 고단하고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반세기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이른바 ‘민중 미술’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졌습니다. 특히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대표작들이 많고요. 그런데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자랐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출신인데요. 살아온 궤적으로 보았을 때는 조금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민중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있나요?

▲학교를 졸업한 뒤 시골인 고향에 갔지요. 제 고향이 부여인데 정말 그곳은 30년 전과 별반 다름이 없어요.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 여전히 그대로에요. 야,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여긴 그대로네. 그것이 주는 느낌, 동네 어귀 당산 나무를 보면서 고향을 떠났을 때와 고향에서의 삶의 궤적이 수미일관하게 통하지 않고 마음속에 와서 콕 하고 걸리는 거예요. 그 때 느꼈죠.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림이 뭐였나,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뭔가? 시골 사람들, 그러니까 친인척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순박한 그 사람들이 내가 그리는 미술에 대해 이해를 못 해요. 이해가 안가는 거죠.

아, 나 혼자 외계어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 혼자 예술을 한답시고 그 안에 들어앉은 것이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었어요. 그전에도 가끔 내가 하고 있는 예술에 대한 정체성을 생각했었는데 그 때 섬광처럼 그런 생각이 지나간 거죠. 사람들이 이해하는 언어로 그려야겠다. 누가 보더라도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그런 쉬운 그림, 내 주변의 그림, 사람들의 그림을 그려야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언어로 그려야겠다. 그렇다면 그건 추상화가 아니고 구상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실천에 옮기게 된 거죠.

 

▲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아베, 박근혜 대통령 조형물

 

 

-흔히 평단에서 이야기하는 그림, 잘 팔리는 그림, 유행하는 그림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일반사람들에게 소위 ‘먹히는’ 그림이 있어요. 반 고흐와 같은 인상파 풍의 그림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걸 내가 그린다는 건 너무 상투적이고 뻔한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건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것만큼 ‘별로’다. 독자적인 생각을 해내야 했죠. 내 나름대로 별도의 구상화를 그려야겠다, 하고 마음먹은 거죠. 자, 그럼 어떤 구상화를 그릴 것이냐? 뭘 해야 할지 고민해야 했어요. 맘 편하게 먹었어요. 한 10년 노력하면 안 되겠나? 그런 생각으로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나가기로 했어요.

 

 

-청계천 옛 버들다리(전태일다리)에 건립된 전태일 열사 기념 동상을 보면 그렇습니다. 뭔가 뜨거운 것이 확 하고 느껴지거든요. 누가 봐도 가슴이 울컥해지는, 그렇게 쉽게 느낄 수 있는 작품세계를 만들어 오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태일’ 하면 우리 세대들이 빚진 것이 있잖아요. 그가 분신한 그 시점이 내가 학교 다니고 있던 70년대 아닙니까. 대학 2년 때였어요. 충격 그 자체였죠. 바로 내 옆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도 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무기력했죠. 그 때의 우리 전부가 그에 대한 책무가 있을 거예요. 항상 마음 속 부채 같은 존재였죠. 그런 의미에서 청계천의 전태일상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민중 작품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전태일기념사업회와도 연결이 되어서 사업회 사람들과 일도 많이 했어요. 그 즈음 사업회에서 여러 경제적 상황도 힘들고 하니 외곽으로 나가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겠다고 해요. 전태일 기념회가 있는 창신동 집을 팔고 마석으로 나가려 한다는 거예요. 가서 뭐 할 거냐고 물었더니 연수원, 교육을 하겠다고 해요. 노동에 대한 교육을 하겠다는 거죠. 교육을 통해 비전을 세워야 한다, 좋은 뜻이지만 변두리로 나가게 되면 더 잊혀질 것이거든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어요. 전태일 열사를 여기서 지켜야 한다. 교육도 여기서, 바로 청계천 이 상징적인 곳에서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밀어붙인 것이 지금의 청계천 광장에 사업회가 존속하게 된 거죠.

 

 

▲ 작품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1997)

 

 

-그러려면 서울시의 협조가 필요했을 텐데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협조를 얻은 건가요?

▲그렇죠. 청계천에 나가려면 서울시의 협조가 필요했어요. 당시 청계천을 총괄 담당하는 부시장급의 임원을 면담했어요. 역시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죠. 사정도 있었겠죠. 이런 식으로 공간을 협조해주려면 국가유공자 전부 다 해줘야 한다, 제한된 면적으로 그건 어렵지 않겠느냐, 또 민원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이 거절 이유였고요.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그래, 가장 권한이 있는 사람과 담판을 지어야 되겠구나…즉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을 찾아갔죠. 상대의 약한 고리, 힘을 역이용해서 엎어 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강하게 밀어붙였어요. 그랬더니 한마디로 “하십시다!” 그러더군요. 그 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죠.

 

 

-당시 정치권에서도 엄청난 반향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시민들의 협조도 그렇고요.

▲그랬죠. 자, 장소는 그렇게 얻었고 그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 고민했죠. 그렇게 힘들 때 시민들이 직접 나서줍디다. 십시일반 성금을 모았어요. 그렇게 보도블록 2000개를 팔아서 광장에 깔았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대중, 김영삼,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박원순 서울 시장 등 당시 유력 정치권 인사들이 총출동했어요.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전태일 열사 기념 거리 설립은 공공미술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이룬 보기 드문 좋은 일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청계천에서 전태일 열사를 되찾고 그의 상징적 의미를 다질 수 있게 되었어요.

 

 

-전태일 열사는 물론 늘 우리 주변의 아픈 모습, 사람들을 다뤄왔는데, ‘세월호’의 아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5월 청계광장에 설치된 ‘못다 핀 꽃’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으로 형상화 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구상하고 설계하는 건지요.

▲주제가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작품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주제를 쓸 것이냐? 하는 물음이 나오는데요. 내용이 튼실하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내용이 형식을 만든다. 즉, 내용이 외피를 결정할 수도 있다. 근데 이게 참 쉽지 않은 것이 제가 한창 일하던 시절에 화단 분위기가요, 화풍이라는 것이 있어요. 당시만 해도 형식이 내용을 결정하는 식이에요. ‘어떤 풍’의 ‘어떤 그림’이다, 이게 중요한 거죠. 그래야 잘 팔리는 작품이고. 그렇게 형식에 치우쳐진 화단 풍토가 있었어요.

그래서 생각하게 된 거죠. 반대로 무슨 내용을 그림에 담을 것이냐? 그렇게 고민해서 내린 작은 결론이 야, 이거 ‘나’를 이야기를 해야겠다. 나? 나는 조국에 속해 있으니 내 조국, 내 조국은 아시아 변방이며 분단되어 있구나. 아, 강제된 분단된 조국에 사는 나, 이런 프레임이 주제로 주어지더군요. 갈등과 모순 속에 던져져 있는 나, 이런 식으로 나를 그리는 것은 우리를 그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내 민족을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개념이 확장되었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고. 그게 우리들 이야기, 사는 이야기, 그러다 보니 웃음도 있지만 슬픔과 고통, 부조리함, 모순이 다 같이 내포되어 있는 그림을, 작품을 하게 되더라고요. 세월호 작품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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