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지새우던 날들의 보상이 저 되먹지 못한 알파벳이라니~
밤 지새우던 날들의 보상이 저 되먹지 못한 알파벳이라니~
  • 승인 2010.01.29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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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영의 이런 얘기 저런 삶> 형사소송법 성적표

공기마저 얼려버릴 듯 차가운 바람에 귓바퀴가 아려온다. 잔뜩 움츠린 탓에 어깨 근육이 아프다. 눈까지 내려 미끄러운 길 때문에 재촉하는 잰걸음조차 소심하다. 현관문을 열자 집 냄새와 따듯함이 훅 끼친다. 냉큼 문을 닫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발바닥에 닿는 방바닥이 따끈했다.

“으~ 추워 추워 추워 추워.”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이런 날씨엔 유자차가 짱이지. 따끈한 유자차에 바깥의 매서운 추위도 잊고 노곤노곤 해지고 있을 때였다.

[지우이이위우잉]

문자 메시지 알림 진동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확인하였지만, 그 내용은 가볍지 못했다.

[야 형소법 성적 떴어 ㅋㅋㅋ]

그야말로 ‘헐’이었다. 안 돼……. 언젠가 닥칠 일이긴 했지만 최대한 늦게 방문해주길 바랬는데. 나의 이 즐거운 방학의 몇 안 되는 근심 중 하나였다. 이번 시험,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하였건만 영 신통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험 마지막 날 마지막 시험의 마지막 답안지를 제출하면서 대학생의 길고 긴 방학이 시작되었다는 기쁨 보다 허탈함이 더 컸음은 그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형사소송법은 정말 끔찍한 과목이었다. 그동안 들인 노력이 무색할 만큼 엉망으로 시험을 치렀다. 답안지를 제출하는 그 순간에 이미 내 성적의 참담함을 미리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빠른 속도로 학교홈페이지에 로그인해서 떨리는 손으로 성적 열람을 클릭했다. 속으로 무슨 주문이나 되는 것처럼 제발 제발 제발 제발을 외우면서. 교수님께서 채점이라도 잘 못 하셔서 이변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페이지가 로드되는 그 짧은 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신경질 적으로 페이지의 닫기 버튼을 클릭했다. 아 정말, 난 뭣 하러 그렇게 오래 시험공부를 한 건가! 근 한 달 동안 책과 씨름을 했던 그 시간들은 대체 어디로 증발해 버렸단 말인가! 남은 것도 없이 허무하고도 처참한 성적이 뇌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약 올리듯 머릿속을 맴도는 그 알파벳 때문에 짜증이 치솟았다. 밤을 지새우던 날들의 보상이 저 되먹지 못한 알파벳이라니 처량했다.

[지이이이잉]

또 문자였다. 저승사자라도 되는 마냥 평화로운 방학의 나날을 망가뜨리고 나에게 근심을 안겨준 그 문자. 착잡한 마음으로 핸드폰의 슬라이드를 열었다.

[확인했어?]

이런…. 지금 이건, 불난 집에 부채질? 답장을 썼다. ‘아, 몰라 ㅠㅠ 완전 패망’. 나의 슬픈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이어지는 친구의 답장은 더 가관이었다.

[나 형소 망친 줄 알았는데 성적 선방(善防)했어 ㅋㅋㅋ. 너도 희망을 가지고 확인해봐 ㅋㅋ.]

친구야… 이미 확인했어. 지금 너 잘 쳤다고 자랑하는 거니? 그런 거니? 슬픈 마음에 답장도 없이 그냥 슬라이드를 닫았다. 지금 이 순간 더욱 슬픈 것은 선방했다는 나의 이 눈치 결여한 친구가 벼락치기를 했다는 점이다. 평상시에 수업 필기도 별로 안하고 시험 준비는 벼락치기, 그나마 전 범위를 다 보고 치면 다행인 그런 친구다. 옆에서 그녀의 벼락치기를 지켜본 나로서는 그렇게 공부를 하면 과연 머리에 남는 게 있기나 할 지 의아할 뿐이었다. 그저 성의 없이 슬슬 읽는 것 같아 보일 뿐이던데. 그런데 결과는 그녀의 승리라니. 내 머리통의 성능이 눈물겨워졌다. 부럽고 또한 애통한 일이다.

항상 결과가 들인 노력에 비례하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별반 힘들이지 않고 그 결과를 얻어내는 걸 볼 때면 그 만큼 속 쓰리는 일이 없다. 설상가상 그가 나보다 뛰어난 결과라면,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원망마저 치민다. 그러나 결과야 어찌되었든 내가 노력한 부분에 대해서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난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아버지께선 준비가 모자라지 않았다고 판단되시면 절대로 그 결과에 대해 힐책하시지 않으셨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이런 속 쓰린 성적에도 불구하고 다음 시험에는 더 많이, 더 오래 준비해야겠다고 다짐 할 수 있었다.

쓰린 마음 고이고이 접어 마음 한편에 밀어두고, 쿨하게 핸드폰을 들어 아까 차마 못 보낸 답장을 보냈다. ‘좋겠다, 짜샤 ㅋㅋ’


psy5432@nate.com <박신영님은 경희대 법학과 학생입니다. `위클리서울` 대학생 기자로 멋진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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